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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루덴스/일삽우일삽

엄마의 일기장

나는 엄마의 일기장을 읽은 적이 있다. 이런저런 잡다한 물건을 넣어놓는 엄마의 문갑에서 무얼 찾다가 나온 **주식회사 이름이 선명한 수첩. 무심코 펼친 부분에 엄마의 글씨가 있었다.
덮어두어도 되련만 무언가 싶어 계속 펼쳐보았다.
처음엔 콩나물 300원, 계란 200원으로 시작하는 가계부틱한 목록이었는데 그 뒷장엔 정말 놀랍게도 엄마의 마음결이 고스란히 담긴 글이 있었다. 아빠에 대한 서운함이기도 했고, 엄마의 돌아가신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기도 했고, 심지어 살고 싶지 않다, 죽고 싶다, 엄마 나를 데려가줘, 라는 어린 마음에는 너무너무 무시무시한 귀절도 있었다. 나달나달하고 쭈글쭈글한 비닐표지 속의 내가 쓰던 공책보다 작은 수첩에 그런 글이 있을 줄은 몰랐다.  거기엔 나의 엄마, 아빠의 아내가 아닌 자연인 ***가 있었다. 그속에서 엄마는 엄마가 아닌 여자였고, 인간이었다.
그 충격이 잊혀지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문학소녀 기질이 다분했다. 내가 보기엔 별로 안 잘 쓴 시를 내밀며 표주박에 물감으로 써달라고 하기도 하고(엄마는 글씨를 잘 못쓴다며) 니스칠까지 해서 장농에 달아두곤 했다. 예나지금이나 장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엄마가 심지어 요샛말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자작시를 딸에게 써달라고 하다니, 평소 엄마답지 않았다.

평생 나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엄마가, 당신의 학창시절, 소녀시절을 얘기할 때는 눈이 빛났다. 내가 써준 원고로 너네 삼촌이 웅변대회 나가서 상을 탔단다. 엄마도 학교 다닐 땐 이런 저런 글을 쓰고 상도 받고 했단다. 공부를 잘하진 못했는데 그야 농사짓고 살림살아야 한다고 학교를 빼먹어서 그렇지.

지금도 가끔 엄마의 일기장이 생각난다.
아주 가끔 집에 내려가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엄마의 문갑을 뒤적거린다. 문갑을 뒤적거려도 참 비밀 하나 없는 단촐한 엄마의 생활. 그 문갑에는 여전히 그 때 엄마의 일기장이 있다.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엄마가 가끔은 무엇을 썼으면 좋겠다.
**주식회사가 주었는지 너무나 뻔한 수첩말고,
엄마만의 수첩에 엄마의 마음을 담았으면 좋겠다.
좋겠다는 건 마음 뿐이고, 무심한 딸은 지금껏 엄마에게 다이어리 한 권 사드리지 않았다.
참 무안하다.

이로운몰 공급사 중에 '자기'라는 곳이 있다. 엄마를 위한 다이어리, 50대를 위한 다이어리를 만든 곳이란다.
고기님하는 자기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 소개글 보기

그 글을 읽으니 더욱 엄마의 일기장이 생각난다.
2010년, 엄마는 예순을 훌쩍 넘었다.
예순을 훌쩍 넘기는 엄마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알 수 없어도 좋으니, 엄마가 자신의 공책에 자신의 마음을 담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누구의 할머니까지 되어버린 엄마에게
가족의 관계 속이 아닌 여자로 인간으로 홀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주고 싶다.

어쩌면 내가 엄마를 위한 다이어리를 선물해도 엄마는 한 줄도 안 쓰실지 모른다.
그럼 어때.
엄마가 엄마의 다이어리를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실 텐데.
여성지의 부록으로 딸려오는 가계부, 아들 딸이 갖다주는 회사 다이어리가 아니라 엄마를 위해 딸이 사준 거니까.

브라보! 엄마의 인생!
브라보! 엄마의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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