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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루덴스/책이랑 놀기

생태주의자의 치매 어머니 모시기, 《똥꽃》

가는 2008년.
제가 꼽은 '올해의 책'에 대한 허접한 단상, 하나 올립니다.^^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어머님과 함께 장수군에서 생태적 삶을 살고 계신 전희식 선생님을 인터뷰하고 만나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뷰도 하면서.ㅎ
기회가 닿는다면 꼭 읽어보세요. 후회 않으실 겁니다.!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기 위한 필독서, 《똥꽃》

책과 함께 하는 동안,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따끔거렸다. 그건 내 부끄러움 때문이었고, 내 위선 때문이었다. 나는 가급적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살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똥꽃》은 그것이 단지 착각이었음을 알려줬다. 그랬다. 이 책은 정작 내 노부모에 대한 예의를 제대로 지키고 있었던가, 하는 뼈아픈 자문을 하게끔 유도했다. 아프고 또 아팠다. 특히나 어머니.


나는 어머니를 다시 생각했다. 2년여 전 위암 수술로 체중이 많이 줄고 아직 수술 전의 입맛을 되찾지 못하신 내 어머니. 그전에도 불효자였던 나는 어머니를 ‘환자’로만 대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움직이는 것이 불안했고, 어머니가 그 전처럼 집안일을 하고자 하시는 것이 불만이었다. 책은 그런 나를 일깨웠다. 어머니를 ‘환자’ 역할에만 머무르게끔 한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었다. 어머니는 어머니 그 자체의 존재였건만, 나는 선을 넘어섰던 것이다. 어머니를 환자의 역할로만 규정해 버린 나의 폭력. 전희식 선생은 치매 어머니를 역할이 아닌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고 있었다. “소박한 효심만으로 늙은 어머니를 모실 수 없을 것이다.”(p.30) 그렇다. 존재에 대한 예의는 친절하고 상냥하고 돌보는 것만으로 지켜질 수 있는 게 아닌데 나는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늙고 더구나 병을 겪은 어머니에게 심신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내 멋대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전 선생이 어머니를 서울이 아닌 장수군의 시골집에 모신 것은 그런 이유였다. 어머니의 남은 인생을 가두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도 나는 어머니를 ‘환자’의 틀에 가둬 어쩌면 사육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존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각자에겐 고유한 삶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있다. 늙고 병들었던 어머니이라손 자유의지로 행동과 생의 행로를 결정하는 것을 온전히 존중해야 한다. 하물며 전 선생은 그 의지가 자유롭지 못할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그렇게 대했건만, 나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 가족의 간섭과 제재는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설혹 그것이 애정일지라도. 가족 사이에 선이 없다는 자체로 그건 폭력이다. 그것이 선의였다고 해도 역할이 아닌 존재를 질식하게 했다면, 그건 비윤리적인 것이다. 전 선생의 어머니에 대한 태도와 자세는 내게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어머니의 존재감을 북돋우고 있었다. 어떤 가치판단 없이 어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존댓말을 쓰고, 오갈 때마다 인사와 큰절을 올리고, 하는 일마다 꼬박 알리고 허락을 받았다. 치매 어머니를 세상 밖에 동떨어진 존재가 아닌, 혼자가 아닌 존재로 여기는 그 태도가 나는 참으로 인상 깊었다. “치매 걸리면 다 그렇다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수롭지 않은 거라고 말은 하면서도 치매 노인의 비난과 의심이 정작 자기를 겨냥하면 열불을 내면서 반박하고 무시하는 것을 나는 많이 봐 왔다.”(p.98)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치매에 대한 편견을 하나 거둬줬다는 것이다. 치매를 단순 병으로 치부하고 치매 이전의 삶과는 단절된, 치료할 수 없는 무엇으로 간주하던 나였다. 그런 면에서 그의 시각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어머니 굴절된 삶의 현재적 표현이 지금의 치매다. 오늘의 어머니를 인정하려면 고른 삶뿐 아니라 굴절된 삶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치매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어머니 인생은 일찍 사라졌을 수도 있다.…치매는 그렇게 살아온 삶에 대한 필요한 현상이고 치유의 과정이다.”(p.99) 한마디로 그의 해석 말마따나, ‘포기한 삶의 틈새로 끼어든 이물질들’.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노인의 고통과 아픔을 덜어 드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 본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상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나는 정작 알지 못한 채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책이 말하듯,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생각하는 돌봄’이 필요한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자식이 없는 삶은 가능하지만 부모가 없는 삶은 없다”(p.250)는 김광화 선생의 언급마냥, 문득 내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밤이 기억났다. 잠자리 들기 전, 나는 갑자기 울음꼭지를 켰다. 아들의 갑작스런 울음소리에 놀라 방으로 온 어머니에게 나는 “엄마가 죽는 게 싫다”고 징징거렸다. 죽음을 처음 인지하던 시기에 어머니의 죽음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날 안아주면서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우리 아들을 두고 먼저 안 죽어”라고 말했다. 그건 물론 거짓말임을 안다. 어린 아들을 안심시켜 주기 위한.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새삼 그때를 떠올렸다. 아들을 두고 안 죽는다고 했던 어머니의 그 마음. 나는 그런 어머니를 얼마나 이해하려고 했던가. ‘어머님의 건강과 존엄을 생각하는 기도잔치’를 통해 전 선생이 건넸던 이 말은 못난 아들인 나의 마음을 콕콕 찔러댔다. “내 어머니를 간절히 떠올리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없이 베풀고 끝없이 용서하는 어머니 마음을 갖는 것, 세상의 어머니로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것, 어머니를 모심으로써 스스로 세상어머니가 되는 것.”(pp.157~158)

그렇게 어머니와 함께 노인들을 다시 생각했다. 고령화 사회, 실버복지 등을 떠벌리지만, 시류는 그렇지 않다. 노인들을 백안시하면서 ‘어리게 혹은 젊게 보임(동안)’에 대한 과도한 경배수준의 찬사를 읊어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풍경이다. 이건, 늙음 혹은 나이듦에 대한 차별이 명백하다. 이 책은 그래서 어떤 경고다. 누구나 늙고 죽어갈 것을 알면서도 젊음 혹은 동안이라는 이름의 분별없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를 향한. 결국 그 분별없는 열정이 훗날 날카로운 부메랑이 돼 우리의 존엄을 훼손하리라는 것을. 

무엇보다 나는 책의 노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깜짝 놀랐다. 전혀 생각지 못한, 품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童話)는 있는데 왜 노화(老話)는 없는지, 노인헌장과 노인생활헌장이 정작 얼마나 노인들(의 존엄)을 배제하고 있는지. “노인에 대한 사회의 무지와 무례가 도를 넘고 있다.”(p.161)는 그의 말은 명백한 사실이다. ‘육아’(育兒)에는 그토록 애를 쏟고 사회적 비용을 들이면서, ‘시노’(侍老)에 무관심한 것은 결국 자신과 사회의 존엄을 깎아먹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큰 행사나 공공기관은 방문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 있도록 시설이 마련되고 놀이교사를 배치하기도 하지만 어디에도 불편한 부모를 모시고 갈 수 있는 행사나 공공기관은 없다.”(p.161)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는 것. 그것에 대해 우리는 좀더 많은 얘기를 나눠야 한다. 누구에게나 닥칠 노년을 위해서라도, 노인들의 마음에 한 발짝이라도 들어가는 일이 중요하다. 전 선생은 책을 통해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사랑은 죽은 세포도 살리고 정성은 통증을 경감시킨다는 체험적 결과를. 노인은 외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같은 하늘아래 숨을 쉬는 존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분들이다. 노인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 얘기에 장단을 맞춰주면서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일이, 우리네 삶의 품격과 존엄을 위해 필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책은 내 얼굴을 화끈거리게도 만들었지만, 내 어머니, 노인, 치매에 대한 새로운 경지를 열어줬다.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동안을 경배하는 사회보다,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노년을 맞기 위한 질문과 답을 할 수 있는 사회, 그런 대화를 격려하는 사회를 만들어 우리 자신의 존엄을 지켜야한다.

충분히 밥값 하고 계시는 내 어머니를 위해, 그리고 언젠가 내게도 닥칠 노년을 위해,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좀더 귀 기울이고 어머니의 존엄을 지키는 아들이고 싶다. 이젠 내가 어머니 등을 두들겨 드리면서, 나를 상하지 않게 하면서, 인간과 존엄 그리고 돌봄을 좀더 생활 속에서 실천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