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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지구인/폰카·디카로 본 세상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면.."

"..큰집 뒷담에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몇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을 때 다려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면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고두현 ‘늦게 온 소포’ 중


지난주에 이로운몰 사무실은 전쟁통이 따로 없었습니다.
프리오픈기 중 설 특판을 진행했기 때문이죠.

그 북새통에 우리가 주문하지도 않은 배 두 상자가 사무실로 배달되었습니다.
"그게 뭐에요?"
이로우너들이 일제히 물었습니다.
(이로우너는 이로운몰에서 직원들을 부르는 말이에요)

식품MD 네네승우님이 무안한 표정으로
"이런 거 보내시면 저 짤려요, 했는데도 보내셨네요" 답하더군요.

'착한농부 유기농배', 박오식 농부님이 보내신 배였습니다.

이로우너들의 반응은,
일제히 '한숨'.

조용해진 사무실에 말풍선들이 동동 떠다녔습니다.

'고급형 배 두 상자면 얼마지? 우리가 얼마나 팔았지? 설마 수익을 안 남기신 건 아니겠지?'
'돈 버시라고 팔았더니 이렇게 돈을 쓰시냐?'
'네네승우가 인터넷도 못하시는 착한농부네 배 파느라 얼마나 애썼는데.'

기타등등
뭐, 이런 풍선들 아니었을까요?

다시 돌려보내지는 못해 결국
배 한 상자는 설 특판 때 '이로운몰 취지 좋다'면서 무리(?)하게 지르신 한 중소기업 사장님 댁으로 보내고
나머지 한 상자는 연휴 전 늦게까지 남아 있던 이로우너들이 나눠가졌습니다.

고백컨대, 설 특판을 진행하면서 이로우너들의 스트레스는 극점으로 치달았습니다.
불황기에 이로운공급자들의 물건도 팔아줄 겸, 빈곤층 돕는 비영리기관들에 이익 기부도 할 겸,
서둘러 진행한 특판이었습니다.
하지만 특판페이지도 없는 상황에서 주문-배송 확인하랴, 본격 오픈 준비하랴,
이로우너들은 입 두개, 손 열개가 부족할 판이었습니다.

사실, 어느 회사가 판매이익 전액 기부하겠다고, 공급자들 상품 팔아주겠다고
프리오픈기에 무리하게 특판을 진행하겠어요.

비영리주주와 영리주주가 공동투자한 사회적벤처라는 독특한 정체성에,
창업기 기업이라는 어리숙함,
게다가 불경기가 겹친 상황 속에서 말입니다.

프리오픈기에 자문가들은 이로우너들한테 충고했습니다.
"고객들은 유기농이라고 하면 인증있는지 없는지 신경 안 쓴다, 똑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가격만 본다"
"이로운몰 상품이 아무리 생산과정까지 본다지만 소비자들은 그런 것 안 따질거다" 등등

그럼에도 좋은 상품만 팔고 좋은 상품 만드는 분들 돕겠다고 고집하는
이로우너들의 마음 몰라주고 배를 두 상자나 선물하시다니...

특판 끝내고 몇몇 이로운몰 공급자분들께 '경기 안 좋은데 이번 설 판매 어떠셨어요' 물었습니다.

경주에 할머니 일자리 만드는 서라벌찰보리빵의 이상운 선생님(사연 보기),
'프리오픈인데도 이로운몰에서 매일 한두 상자, 열몇 상자 주문 들어오는 게 재밌더라'며
 웃으시더군요.
(에휴, 쇼핑몰에서 하루 10상자 팔아 언제 할머니들 월급 마련하나요. 재료비에도 돈 많이 쓰시잖아요.)
 
유기농, 천연재료로 조미료 만드는 현재농원 박찬웅 대표님(사연 보기),
'화학조미료보다 맛없는데도 이로운몰에서 파는 것보니 역시 유기농 녹색이 차별화 길'
이라며 확신하시더군요.
(대표님, 저희도 그 차별점을 아는 소비자들을 찾고 있답니다.)

이로우너의 한숨과 말풍선들 속에 오픈 10일 전의 밤이 지나갔습니다.

오픈을 8일 앞둔 일요일 오후,
이로운몰 사이트 개편 준비하느라 노트북 앞에 앉아 아침에 깍아둔 배를 꺼냈습니다.
아침에 깍은 색깔 그대로더군요.
갈변 없이 맑은 빛..

네네승우님의 착한농부 탐방담과 후일담이 떠올랐습니다.
착한농부님이 유기농 배 키우려다 몇번이나 힘들어 포기하시려했다는 사연
,
착한농부의 배 봉지에서 튀어나왔다는 청개구리 (사연 보기)
국제유기농인증 받고도 인터넷 쇼핑몰에 익숙치 않다는 뒷얘기 등등

착한농부님의 즙 많은 배를 아작아작 씹어먹으면서
배 보내신 마음이 새삼 맛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달고 큰 배 키우시느라 얼마나 오래 고민하고 고생하셨을까,
또 얼마나 많이 포기하고 싶으셨을까,
그런데도 고집스럽게 유기농을 지키셨던 자부심은 얼마나 컸을까.

착한농부님은 그저, 그 마음 나눠담은
배 한쪽 멕이고 싶으셨던 것 아닐까요? 
그 마음 닮은 쇼핑몰 만들어 잘 키워보라고...

문득,
지인으로부터 받은 시 한편이 떠올랐습니다.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을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 고두현 시집『늦게 온 소포』, 민음사, 2000


여러분,
그동안 고생 많으셨지요.
이 시절 지나면 좋은 일 있지 않겠어요.
시절이 어렵더라도
꼭 몸은 추스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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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연진 :  착한농부 배, 농군마을 토마토와 잣. 정관장네 홍삼차. 나눠묵자네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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