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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지구인

청춘의 시작과 끝, '리버 피닉스'

오늘, 시월의 마지막 날.
의도(?)한 바는 아닙니다만, 가을비까지 흘러주시니,
촉촉하게 젖은 계절의 감수성을 충분히 만끽하게 해주는군요.

오늘, 잠시 쉬어가시죠~
뭐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시월의 마지막 날'이잖아요.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헤어졌다던.  

그래서 늘 이맘 때,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좀더 어린 시절, 절 매혹시켰던 한 청춘의 시작과 끝.
어쩌다 헐리우드라는 정글에 몸을 담게 됐지만,
히피처럼 자연과 좋은 사람들과 공생하면서 생을 꾸리고 싶었던 한 청춘.

오늘 하루,
1993년 10월31일, 구름의 저편으로 간, 
길의 감식자, '리버 피닉스'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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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말.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꽃을 먼저 꺾어 식탁을 장식하듯,
신은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데려가 천국을 장식하신다… ”


그래서일까. 어떤 청춘은 천재의 이름으로, 신화란 명목으로 이른 하늘의 부름을 받는다. 10월의 마지막 날, 한 청춘이 영원히 박제됐다. 시작인줄 알았던 청춘은, 끝을 선언했다. 내가 아는 한 아름다운 청춘의 시작과 끝, 그 이야기.


리버 피닉스. 지난 93년 10월의 마지막 날, ‘유목민의 아들 ’로서 세상에 처음 등록을 했던 리버가 할로윈 파티를 핑계로 들썩거리던 선셋대로에서 영원한 잠을 청했다. 23년, 길지 않은 세월.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었던 청춘은 그렇게, 한 시절을 마감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청춘의 끝. 시작부터 리버는 어쩌면, 그 끝을 잉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리버는, 기실 실체를 잡기 힘든 청춘의 아픔이 고스란히 투영됐다는 점에서, 청춘의 아이콘이자 자화상이었다. 청춘 예찬의 다른 한편에 둥지를 튼. 왜 그렇게 훌쩍 우리 곁을 떠나야 했는지, 무엇이 그를 차가운 바닥으로 내몰았는지, ‘Nobody Knows’. 다만 리버에겐 삶과 죽음은 이항대립이 아니라, 자웅동체의 구조물이었으리라. 

그런 면에서, <아이다호>는 리버의 생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혹자는 이 영화를 보는데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툭하면 쓰러져 둥지에서 떨어진 새처럼 길 위에서 떠는 영화 속 그의 모습이 차가운 보도블록 위에 뒹구는 그의 최후와 포개지기 때문 ’이라고. 짧은 시간 태엽처럼 휘감아 돌던 청춘의 흔적이 그토록 강렬하게 와 닿는 건 리버도 여느 전설마냥 생을 일찍 마감했기 때문이다. 어느 청춘이나 한때 그런 삶을 꿈꾼다는 점에서 더욱이나.

청춘의 빛나는 표본, 리버 피닉스

리버를 처음 본 것은, <인디아나 존스>에서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의 어린 시절로 나왔을 때. 그리고 <스니커즈>에서 재기발랄한 청년으로 나온 리버를 만났다. 강렬한 눈빛과 깎아 만든 아름다운 얼굴이 인상적이었던 배우,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다, <아이다호>를 만났다. 이후 죽음의 구덩이로 발을 디딘 그를, 가슴 한켠에 아로새기는 건 당연한 나의 몫.


리버는 독특한 체취를 풍겼다. 게토에 머물렀던 청춘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할리우드의 거대 울타리 안에서도. 리버의 청춘은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장식했던 시기의 우상이었다. 랭보가 보낸 ‘지옥에서의 한 철’이나 제임스 딘의 ‘에덴의 동쪽’이 어디에 있으며, 짐 모리슨의 ‘The End’가 어떤지 알고 싶어하던 시기, 리버는 살아있는 표본이었다.

그런 와중에 날아든 리버의 부고. 죽지 않는, 불멸의 새, ‘피닉스(Phoenix)’라는 이름은 아이러니였던가. 아님 그의 청춘을 불멸의 것으로 명명하기 위한 정해진 수순인가.

자유와 청춘, 그리고 길의 감식자, 리버 피닉스

아마도 리버는 후자가 아니었을까. 아라비아 사막에서 500∼600년마다 스스로 향나무를 쌓아올려 타 죽고, 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영조(靈鳥)라 불리는 ‘피닉스’. 리버는 결국 탐욕과 권모술수가 판치는 할리우드를 견디지 못하고 향나무를 쌓아 올린 것이다. 히피와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 자본과 탐욕의 경계 안으로 몰리면, 선택은 불을 보듯 훤하다. 불사의 길. 리버의 선택은 자명했던 셈이다.

혹은, 미이라 콤플렉스에 시달렸는지도 모른다. 이집트 미이라처럼 사후에도 영원히 감정을 박제하고픈 욕망처럼, 청춘은 봉인해야만 그 가치를 지킬 수 있다고 본 건 아닐까. 세월 앞에 변치 않을 청춘은 없음을 알기에. 아니면, 그렇게 아프고 쓰라린 상흔을 품고 있음에도, 우리가 언제나 예찬하는 그 청춘을 지키기 위해. 리버는 선택했다. 시작과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청춘에 머물 것을. 청춘, 그 박제하고픈 가상현실은 영원히 버릴 수 없는, 지울 수 없는 그림자처럼, 리버에게 따라붙어 있다.

리버, 어쨌든 나쁜 녀석이다. 떠나기 전 나보다 ‘형’이었던 그는 여전히 그대로다. 나는 이제 그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하고 싶지 않은 일도 억지로 해야 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은 일이 더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세월은 점점 더 내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청춘의 시작과 끝, 리버 피닉스.

<아이다호>에서 영원한 마음의 고향을 찾아 헤매던 리버는 어쩌면, 그 아이다호를 찾아 원혼이 돼 있는 건 아닐까. 끝없이 나 있을 것 같은 2차선의 길 위에서,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청춘의 자화상을 드러내는 <아이다호>에서의 리버. ‘그 길을 간 적이 있음에도’ ‘엔진을 끄지 말아야 했음에도’ ‘일그러져 보이는 그 길을’, 리버는 어김없이 거닐고 죽음 같은 몽환 속으로 빠져 들었다. “평생 길을 맛볼 거야. 이 길은 끝이 없어. 지구의 어디라도 갈 수 있어...” 라던 그의 대사처럼. 길의 감식자, 청춘의 감식자였던 리버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다.

이렇듯 가을에서 겨울을 넘보는 문턱이 되면, 늘 몽환적인 선율과 그 삶으로 인해 아름다웠던 한 청춘이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이런 말을 건네줄 것 같다. “안녕? 나와 함께 아이다호로 가주지 않겠니?”라고. 이 불가해한 청춘의 이야기.

하지만, 정말 그가 ‘피닉스’처럼 다시 살아나길 바라지 않는다. 박제된 청춘 그대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길. 다시 태어나도 같은 굴레에 머물 것이라면 그 신비감을 유지한 상태가 좋다. 사람의 있을 곳이란, 그렇게 어쩌면 누군가의 가슴 속밖에 없다. 우리의 청춘도 그렇게 자연스레, 소멸할 것이다. 가슴에서 영원한 청춘으로 머물러다오, 리버 피닉스. 
('히치 하이커'에 기고했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