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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지구인

나는 증오한다, 고로 존재한다...

지난해 이맘때 썼던 글입니다.
3년 전, 오늘(10월27일),
어쩌면 머나먼,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우리라고 자유로울 수 없지 싶어서.
21세기는, 지구는, 여전히 야만과 잔혹이 판치는 소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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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어딜가도 차별은 존재한다.
차별'없는' 세상은 거짓이다. 차별받지 않거나 차별하지 않고 있다고? 에이~ 거짓말! 일상을 살펴봐라. '차별'이란 단어가 얼마나 자주 당신 입에서 들락거리고 무의식 중에 발현되고 있는지. 계급, 장애, 나이, 성별, 인종, 국적, 학력, 재력, 지위, 정규직여부… 셀 수도 없이 많은 요인에 의해 차별은 일상에 뿌리깊게 박혀있다. 가장 가까이 형제, 자매, 남매 사이의 차별도 있고. 이른바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이나 '아친남'(아내 친구 남편)에게 '굴욕' 당하고 있진 않은가. 그리고 혹시 그 주체가 되고 있진 않은가. 비교당하면서 차별당하는 일상사. 혹은 비교하고 차별하는 사람살이.

2005년 10월27일.
2년 전 프랑스는 들끓었다. 이른바 '방리유 사건' 때문이었다. '방리유(banlieue)', 도시외곽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그 방리유, 클리시부아에서 얼척없는 일이 있었다. 이슬람계 이민자 2세 소년들이 '라마단' 참여를 위해 뛰어가다가 경찰의 불심검문을 피해 송전소 담을 넘었는데, 그만 감전사했다. 경찰은 "주변의 절도사건을 조사하던 경찰관이 이들을 용의자로 보고 검문하려 했을 뿐 추격전은 없었다"고 발표했고, 대다수 언론은 경찰 주장을 그대로 보도했다. 어라. 그러나 주변 지역에 절도사건은 없었다. 속았다. 경찰과 언론에. 이런 계쉐요들.

이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시위는 200개 도시로 번지면서 3주 동안 프랑스를 뒤흔들었다. 차별받고 억압에 짓눌리던 이주민들이 불을 지르는 등 '못참겠다'고 일어섰다. '자유·평등·박애'의 나라, 프랑스의 이면이 까발려졌다.  조까라 마이싱. 방리유의 무슬림들은 그 얼척없는 사고를 계기로 '이렇게 차별받고 못살겠다'고 확 내지른 것이다. 프랑스 인구의 10% 이상을 차지하면서도, 주류에 의해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이들. 가난을 대물림해야 하고, 교육기회를 박탈당하며, 일자리를 얻지 못한 이들. 2차 세계대전 이후 '값싼 노동력'의 필요에 따라 프랑스 경제재건에 일조한 그들이었지만, 경제상황의 악화는 그들을 필연적으로 소외시켰다. 물론 그들의 일부는 섞이기를 거부하거나 융화노력을 게을리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국 프랑스는 '통합정책'을 성공적으로 구사하지 못했다. '톨레랑스'는 구호였고, 소외지역을 끌어안지 못했다.

사실, 프랑스의 10월은 이주민들의 피가 낭자한 역사다.
1961년 '파리 대학살'이 있었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알제리인들의 시위대를 경찰이 유혈진압하면서 벌어진 유혈사태.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경찰테러에 "적들을 부숴라"며 광분한 모리스 파퐁 당시 경찰청장의 광기는 실로 엄청난 비극을 초래했다. 특공대까지 나선 유혈진압. 강에 던져 익사시킨 경우도 있었다. 프랑스 정부의 검열과 언론의 은폐로 쉬이 드러나지 않던 이 대학살은 1998년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됐다. 2001년 10월17일 위령패가 세워졌다.

방리유는 끝나지 않았다.
세계는 점차 경계가 없어진다지만, 거짓말이다. 그건 자본의, 있는 자들의 논리다. 21세기에도 야만이 횡행하는 건, 분리주의가 점차 공고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바리'를 공고히 하려는 발악의 강도가 점차 강해진다. 프랑스만 해도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된 것은, 아무리 그가 이민자 2세라지만, 분리정책이 점차 강해질 것임을 예견케한다. 그 인간이 당선된 뒤 전국적으로 벌어진 시위가 이를 대변한다.

왜 '촌사람'끼리 싸워?
지구촌. 글로벌 컨추리. 떠벌리며 뭘하나. 왜 '촌사람'(!)끼리 치고박냐고. 피까지 보면서. 우리라고 예왼가. 심하면 심했지. 소수자, 이방인, 주변인에 대한 박한 시선을 보라구.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조선족이 종로 한복판에서 얼어죽고(<다섯개의 시선> 중 김동원 감독의 '종로, 겨울'), 불법체류단속으로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상다반사처럼 벌어지지?
궁금하지 않아? 어디 지역에 가서는 '우리가 남이가'라고 씨불렁대면서, 정작 분리하고 차별하는데 익숙한 인간들. 차별과 분리정책이 이 지구를, 세계를 얼마나 우울하고 슬프게 만들고 있는지. 개인적인 차별이 쌓이고 쌓이면서, 그것은 사회적인 분리로 확산된다. 잘난 위정자들은, 기득권 세력은 이 땅의 방리유는 어떤가,를 제대로 짚고 있을까. 화해와 공존은 그저 교과서에서나.
2007/10/24 - ['착한' 미디어] - '외국인노동자' 아니죠~ '이주노동자' 맞습니다~

오래 전, 한편의 영화가 있었다.
방리유의 유혈사태를 예견한 듯한. 그들이 왜 증오하고, 그 증오가 왜 때론 타당한지, 우리는 무엇을 가져야할 지. 내게, 당신에게, 이 고민은 여전히 아직도 유효한 것 같다. 10월27일. 나는 '차별'을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그늘, 그 뿌리엔 '차별'이 있음을. 아래는, 3년 전 오픈아이에 기고했던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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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누가 증오를 나쁘다 했던가

누군가 이르길, ‘증오하지 말라’ 했다. 그런 탓인지 ‘증오’는 졸지에 ‘나쁜 무엇’으로 낙인 찍혔다. 정작 당사자인 ‘증오’의 의견은 물어보지 않은 채 ‘증오 죽이기’에 나선 일종의 마녀사냥이었다. 아, ‘증오’는 얼마나 가슴 아파하고 울었을까.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똬리를 튼 중요한 감정 중의 하나였는데 말이다. 무턱대고 하지 말라니. 사람살이, 그리 마음먹은 대로 되남, 쯧쯧...

“싫어 싫어” ‘증오’가 소리치며 울부짖는다. 저런 저런, 저걸 어쩌누. 누가 달래줘야 할 텐데. “증오야 참아라. 어쩌겠냐...” “괜찮아, 괜찮아, 울지마.”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증오’에게 건네는 각 한마디. 과연 먹힐까. 누구 ‘증오’ 달래줄 양반, 손 들어보쇼잉~~~

그런데, ‘증오’가 무슨 일을 했길래, 저리 난리더냐. ‘나쁜 짓’을 하긴 한 거여? 글쎄다. 답이 하나로 똑 부러지지 않는다. 곰곰이 떠올려보자. 누군가 나를 갈구고 짓누르는 데 ‘증오가 없다?’ 악행 앞에서 ‘증오하지 않는다?’ 이런 이런, 이건 ‘증오’를 배제한 ‘사랑’이 아니구 ‘무기력’ 그 자체잖아. 지배계층은 피지배계층에 ‘증오’하지 말 것을 설파한다. 그들이 ‘증오’를 불러내면 그 목표는 당연 자신들이자너. 아, 뻔뻔할 손, 감히 증오만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나. 용필형의 노래를 빌어보자. ‘누가 증오를 나쁘다고 했던가~~~’♬

⊙_ 방리유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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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했다. 증오한다. 증오할 것이다. 증오는 평생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든지, 순간순간 나를 지배할 것이다. 당연하지 않아? 사람살이가 줄곧 평온할 수만은 있나. 지지리궁상이 됐건, 삐까번쩍한 로또적 삶이 됐건, 이런저런 굴곡을 넘나들며 거친 격랑 속을 헤집고 다니는 게 사람살이 아니더냐.

여기, 방리유의 삶도 마찬가지다. 빠리지앵들의 엘레강스하고 럭셔리한 라이프스타일만 있는 곳이 프랑스 빠리가 아니다. 그 빠리에는 이민자들과 부랑자들의 집산지이자 지지리궁상 같은 삶들이 팔딱대는 방리유도 있다. 재생불능일 듯한 세 양아치, 빈쯔(뱅상 카셀), 사이드(사이드 타그마위), 위베르(위베르 쿤드). 유대계, 아랍계, 흑인으로 짜여진 짬뽕 청년들에게 아랍의 16살 소년 압델이 경찰의 고문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파된다. 21세기가 될 때까지 살아남는 것이 가장 큰 지상목표였던 이들에게, 부랑자나 다름없는 청춘들에게 ‘증오’가 다가온다.

⊙_ 삶은 달걀이다

그런데 빈쯔 녀석도 웃긴다. 아랍계인 사이드는 유대계 빈쯔에게 "압델이 죽는 거랑 너랑 무슨 상관이야?"고 묻는다. 맞다. 인종적 공통점도 없고 아는 사이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빈쯔는 증오하고 분노한다. 녀석에게 총이 생겼기 때문이다. 압델이 죽으면 자기도 경찰 하나를 쏴 죽일 거라고 큰 소리까지 뻥뻥. 이 팽팽한 긴장감, 아... 이 불안감이 나를 팽팽히 잡아당긴다. 

뱅상 카셀이 연기한 빈쯔는 날 것 그대로의 분노다. 세상에 연착륙하고 싶은데 어디 사회가 그런가. 그러나 빈쯔는 정작 압델의 죽음 앞에 갈등하다 총을 위베르에게 넘긴다. 그러다 무심히 불을 뿜는 경찰의 총구. 털썩. 빈츠는 총에 맞고 위베르와 경찰은 서로 머리에 총을 겨눈다. 그리고 추락하는 이미지. "아직은, 아직까진 괜찮아. 추락하는 건 중요한 게 아냐. 어떻게 착륙하느냐가 중요하지..." 추락의 끝은 과연 착륙인가. 그렇지 않다. 증오를 쏘옥 빼버린 그들에게 삶은 해독 불가해한 것이다. 삶은, 달걀이며 달걀은 결코 닭이 될 수 없다....^^;;;

_ 난 증오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들이 생을 연장하고 싶어 했던 21세기. 빈쯔는 살아 숨쉬고 있을까. 그는 여전히 대책없는 투덜이 혹은 루저일거다. 지가 별 수 있나. 말만 번지르르한 ‘세계화’는 여전히 차이가 차별을 부르는 구라의 시대를 뜻함이 아니던가. 혁명이 사라진 시대, 증오할 줄 모르는 시대, 세상을 전복한다는 것은 교과서에나 가끔 나오는 과거형의 말이다. 그건 중요하지도 않다.

아버지가 됐건, 회사가 됐건, 혹은 국가이건 민족이건 증오해도 괜찮다. 증오는 때론 사회를, 조직을 위협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 하지만 어떤가. 증오는 순전히 자신만의 꺼다. 치명적일 지라도 그것이 나를 자유롭게, 나를 나답게 한다면.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라 했던 노희경 작가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증오하지 않는 자, 역시 유죄!!!” 판단은 당신에게. 


P.S... 그리고, 필요한 책이 있다면,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 : 공존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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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컨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