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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루덴스/일삽우일삽

식물은 힘이 세다

나는 식물을 키운다. 다른 사람이 보자면 겨우 이거? 라고 할 정도로 내놓고 말하기가 쑥스러운 수준이고, 심지어 몇 되지도 않는다. 그래도 몇 년에 한 번 이사를 할 때마다 이삿짐센터 분들께 가장 먼저 “화분은 꼭 조심해주세요”라고 부탁한다. 솔직히 새로 산 옷장 흠집나는 건 괜찮아도 화분 하나 깨지는 건 정말 마음 아프다.(실제로 몇 번의 이사에서 그렇게 화분이 작살나기도 했다)


나는 식물을 키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키우고 보살피는 게 아니라 그냥 함께 산다. 무엇을 키우고 보살핀다고 하기 부끄러운 수준이다. 일 년이면 식물 한두 개는 어김없이 죽어나간다. 남들은 잘만 키우는 식물도 그렇다. 그 때마다 왜 나는 ‘그린 핑거’가 아닌 것인가 절망하기도 하고, 다시는 안 키운다, 결심에 결심을 하기도 하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화원에 들러 “절대 안 죽는 걸로 주세요”라고 외치는 나를 발견한다.


내가 식물을 키운 건 혼자 살면서부터다. 처음엔 텔레비전 위의 선인장으로 시작했다. 전자파를 막아준다고 한 때 떠들썩하지 않았나 왜. 아주 가끔 손바닥만한 화분을 사서 한두 개 올려둔 게 그 다음. 그후론 유행에 따라 시류에 따라 공기정화에 좋다는 파키라부터, 행운을 불러준다는 행운목에 실내정원에서 유행하던 수생식물에 때로는 싹을 티워 싹채소도 먹고 심지어 콩나물재배기를 사서 콩나물도 길렀다.

지금은 식용식물은 다 접었고(실패해서가 아니라 그 녀석들의 속도를 나의 요리 빈도가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함께 사는 녀석들만 있다.
 

물 먹느라 잠시 베란다로 나와 있는 녀석들. 옹기종기 모여 있을 땐 참으로 정답다.


그렇게 서툰 동거를 하면서 내 생활이 조금은 변했다.


여름밤 모기 때문에 몇 번이나 잠을 깰지언정 전자모기향이나 뿌리는 모기약을 쓰지 않는다는 것. 나만 살 땐 몰랐는데 식물과 살면서 전자모기향을 피워보니 요놈들이 너무 힘들어하는 거다. 먹는 거라곤 공기와 물, 햇빛뿐인데 싶어 끊은 지 몇 년 됐다.


식물도 자잘한 병을 앓기 마련이고, 비실거릴 때도 많다.(고백하지 않았나, 지금까지 내 집에서 죽어나간 식물도 꽤 된다고) 옛날엔 너무 조바심이 나서 성분 모를 영양제를 잔뜩 투여하곤 했으나 이젠 햇빛 잘 들고 바람 잘 통하는 베란다에 놓아두는 게 전부다.


너무 과한 애정도 식물에겐 독이다. 말라죽는 식물보다 뿌리가 썩어 죽는 식물이 더 많고, 뿌리가 썩는 가장 큰 이유는 녀석들이 먹어야 할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식물과 함께 산다는 건 사람과 함께 사는 것과 닮았다. 너무 과한 애정과 관심은 마음을 눅눅하게 만들고, 무관심은 사람을 건조하게 만든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즉각적인 해답을 주는 것보다는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다. 때로는 백 마디 말과 관심보다 한 줄기 바람과 햇살, 그 속에 고요히 흐르는 분위기가 더 위로가 될 때도 있는 법이니까.


얼치기 동거인이라도 정 붙여가며 벌써 몇 년째 나와 함께 사는 식물 몇 놈이 있다. 제일 오래 함께 산 녀석이 벌써 8년. 이제는 녀석도 시들시들한 것이 떠날 때가 되었나 싶다. 물을 줄 때마다 작게 (꼭 드라마처럼) “힘내라, 녀석아!”라고 속삭이는 나를 발견한다. 주책이다. 그래도 예전처럼 식물이 죽을 때마다 너무 자책하진 않는다. 생명을 책임지고 있다는 엄숙함과 책임지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몸을 떨진 않는다. 내가 점점 무뎌져서라기보다는 어쩌면 녀석에게 허락된 시간이 그쯤인가 보다, 어쩌면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 때도 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식물과 살면서 나는 ‘삶’과 ‘죽음’을 자주 경험한다. 잘 이별하는 법도 배우고 싶다.


식물은 말이 없다. 조르는 법도 없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손을 뻗어 햇빛을 받으려고 할 뿐이다. 파삭한 땅에서 최대한 발끝을 늘여 물을 먹을 뿐이다. 식물은 참 무던하다.

식물과 함께 하다보면 품성도 조금쯤은 ‘식물’을 닮아가는 법, 이라고 쓰고 싶지만, 아직도 식물에게 신세만 지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다. 그저 언젠가 ‘식물’을 조금은 닮을 수 있겠지 하는 게 내 믿음이자 소망이다.


식물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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